그럼에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암굴왕 (몽테 크리스토백작, 2004)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끓는듯한 복수의 서막을 지나 전막을 향해 광기서린 그의 작안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다.

암굴왕. GONZO의 2004년작.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원작 기반 줄거리는 따라가되, 현대적 감각의 삽입과 구성적 각색을 포함한 SF 판타지 성향을 가미하였다.

암굴왕이라는 작품에 관심은 있었으나, GONZO의 작품이라는것이 썩 호감스럽지 않아서 미루고 있었는데, 보기 시작한 결과 시선을 압도하는 영상미에 한 번 놀라고 작붕에 이은 퀄리티 붕괴가 끝까지 없다는 몇 안되는 곤조작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애니메이션 초반부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꺼내든 원작을, 벅찬 감동에 장면장면에서 눈물샘의 벅차오름을 느끼며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연유에서인지, 원작을 다 읽은 후부터는 안그래도 천천히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 감상 속도가 조금 더 느려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SF 판타지 장르로 각색된 애니메이션이 눈과 마음에서 설었으리라. 해서 중반부 진입까지는 아주 극악으로 천천히 보게되었다. 

초반부의 스토리 전개 스피드에 있어서는 빠른편이긴 하지만, 원작의 초반 스토리가 생략되고 본론부터 들어가는 전개 과정은 보는이로 하여금 끓는듯한 복수의 당위성을 인지시키는데 있어 상당부분이 상실된 채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함에 있어 원작 초반의 흥미진진한 전개와 그 후 진행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원작처럼 그다지 강하게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모든 과거와 비밀들이 거의 후반부에 되어서야 하나하나 회상형 설명식으로 짧게 풀어지기 때문에 아마 원작을 보지 않는 이라면 초반부에 지루함을 토로하는일도 충분할듯하다. 뭔가 분명히 있는것 같은데, 그 뭔가가 베일에 감춰진채로 계속 진행형인 전개형식. 이런식으로 갈등의 해소를 끝으로만 몰아가는 극전개는 그닥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류와 식의 극소설은 시간 순서가 뒤바뀌어 버리면 순차적인 진행보다 감정의 동화 작용이 상당히 무뎌진다. 극 안의 사람들의 희노애락애오욕을 극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상황으로 동화시켜 인식하게 하는것이 소설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해서 그 부분에 있어서의 원작의 스토리 전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기승전결의 구도를 순차적으로 답습해나가는 스타일로 내가 추구하는 극소설류중 최상의 지향점이었다.  

중반을 넘기고부터 보면서는 부분적으로 감탄하며 넘길수 있는 정도의 스토리 각색 능력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원작의 기반 스토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원작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부터 결말까지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석을 보여주었다. 애니 중반 도입부터 원작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의 내용이 담긴다. 장면에 따라는 파격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전혀 다른 스토리와 장면구성으로 SF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스펙타클한 화면 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적 감각에 맞춘 극적인 묘사라는 점에서는 퀄리티를 최대치로 끌어올려주었다.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라는 작품은 인간사의 법칙인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표방하고 있는 대작이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만으로 소설을 주시하게된다면 중간중간 피와뼈를 자제하는듯한 전개에 미약감이 느껴졌던 부분이 약간 없지 않았다. (번역본의 문제 일 수도 있다) 예들들어 한 장면, 알베르와 몽테크리스토백작과의 결투씬에서, 결투의 신청 ㅡ> 결투 장소 장면 ㅡ> 결투 포기 선언. 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전개는 지금 보기엔 극소설로써, 또 독자들에게 복수극으로써의 극적인 요소를 차감시켜버리는 스토리 전개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차라리 결투 신청 장면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읽었으니 말이다.

또 한부분은 제일 마지막 복수 대상이었던 당글라르에게 행해진 복수장면. 원작에서는 펜을 잡은 뒤마의 손의 힘이 빠진듯한 허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을 떼어내고 조합하여 SF 판타지 장르에 부합하는 환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결투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 정말 멋지게 표현되었다. 음향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히 신경쓴듯한 흔적. 그러나 그 멋진 화면 구성과 연출력에 비해, 그 장면에서의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의 개연성은 그다지 썩 없었다고 보여진다. 프란츠라는 오리지널 인물을 내세워 의리와 우정을 앞세운 대리 결투 한마디로 죽음을 대신하는 벗, 이라는 설정이었는데,
글쎄... 죽음을 대신하는 벗이라...... 각색되어진 최첨단 SF 판타지적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 예전 홍콩 영화 그것도 신파식 느와르 각본이 아니었는지, 해서 상당히 마뜩찮았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주인공인 알베르의 핀치 장면에서 희생 정신을 발휘하는 또 다른 인물의 장면이 한 번 더 나오는데, 역시 위 내용과 비슷한 개연성 없는 제 삼자의 희생이라는 설정. 뭐 이부분에서 생명을 희생하여 타인을 지켜내는데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심장을 공략하는 감동을 끌어내려 헀을것이다. 일단 개연성에 앞서서 생명을 희생한다는것 자체에 독자나 시청자들은 감정이 동할테니.... 감동이라는 명목하에 생명의 희생이라는 포커스는 끔찍스럽게 않은가. 감동이 무슨말인가. 그러니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억지스럽다는 감정의 동함만 있었을 뿐, 그 동함의 이름은 그런 일반 대중적 감동 코드에 대한 짜증섞인 혐오였다. 잘 생각해보자.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것이 과연 자신안에서 그리 고뇌없이 쉽게 용인될 수 있는것인지.

굳이 시각적인 의미를 부여 한다해도, '무고한 희생의 순환'이라는 메시지의 측면으로 보기엔 무리수가 있다.
에드몽의 경우가 그랬듯 무고한 희생, 그리고 그 후 그것에 대한 증오의 재생산, 또 그러한 것들의 순환고리. 음, 이 장면들을 아마 이런 순환고리로 본다면 어느정도 개연의 논리가 성립이 되겠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이미 인간의 마음을 잃은 상태였다. 인간의 마음을 잃은 그의 앞에서 인간은 인간임을 외친다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철처하게 계획된 처절한 복수극을 진행시키고 그 상황이 완료되어 감에따라 자신이 복수의 당위성에 대해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원작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달리 애니메이션 암굴왕에서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에게서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는 설정. 이프성에서 함께 어둠과 빛을 논하였던 피리아 신부의 존재를 4차원의 흑막의 계약자의 설정으로 각색하여 피계약자인 암굴왕과 피끓는 복수의 계약을 하고 그 계약의 낙인을 몸안에 지니고 있는 계약자, 즉 복수극을 이행하는 한 개체라는 인물적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작품에 늘 따라다니는 당위성,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에 상응하는 당위성 문제를 거론하기가 참 난감해지는 부분이다. 복수극을 진행하기 전인, 진행 준비 단계에서 이미 처철한 복수만을 위해 자기자신을 내던진 애니메이션 암굴왕의 몽테크리스토에게 어떤 어떤 말을 건네는것이 가장 적확할까 말이다.

애니메이션 암굴왕에서의 주인공 설정은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페르낭과 메르세데스의 아들인 알베르에게 각각의 설정이 분배되어 있다. 알베르를 주인공으로 인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스토리상 전지적 시점에 있거나 그를 주로해서 주도해 나가는 전개라고는 볼 수 없다고 여겨지기에, 알베르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고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엔딩장면에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닌 알베르의 컷으로로 마무리 지어지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의 주인공을 알베르로 보는가... 엔딩부근의 그의 내레이션으로도 알 수 있지만,이 암굴왕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만나기 전의 알베르라는 인물은 권태로움에 젖어 방탕함에 제 몸을 내던지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던 그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음울한 판타즘을 페로몬으로 삼고 있는듯한 수수께끼의 인물과 만나게되고 그에게 왠지 끌리는듯한 호감에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권태로운 삶과는 철처하게 반대인 신비로운 그를 알베르는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계획대로 진행되어 그를 손에 넣게된 몽테 크리스토 백작.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최종 목적은 복수의 마지막 응징, 즉 살해였다. 약을 복용하면서 자신이 암굴왕의 전신이 되버리는것을 늦춰오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증오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계약자의 낙인이 그의 전신을 뒤덮어버리게 된다. 허나 알베르는 그에 굴하지 않고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인간의 마음으로 회유하려 한다. 그 회유에 이끌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에드몽 당테스로 돌아온 순간, 그 안에 미약하게나마 잠재되어있던 의 인간으로서의 심장이 반응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흑막의 계약자 암굴왕과 계약을 맺어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 인간으로서의 심장이 반응하는 그 순간, 그가 인간으로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마지막 증거인 심장은 파괴된다.

분노에 잠식되어 영혼을 계약해버린 그였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의 회귀의 마지막 보루, 심장은 지니고 있었던 암굴왕.
 

애니메이션 암굴왕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수라는 모토를 확실히 원작보다 잘 살려내어주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암굴왕은 시각적 화려함에 더 치중해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화려한 영상미도 독특하고 괜찮았지만, 전개 과정을 현 시대의 상실논리와 연결시켜 주었어도 좋았으련만 아무래도 감정의 시선이 영상에 주로 고정되다 보니 원작에선 치밀했던 인물간의 다단한 감정 노선이 상실되어 있었고, 작품 감상 뒤의 사색의 여운은 원작보다 현저하게 약했다.

원작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보고 나서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소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는 결말 부분에서 왠지 아련한 감동과 함께 그네들의 회한어린 한숨까지 같이 몰아내쉬게 되더라.
알렉상드르 뒤마, 대 문호의 작품인 몽테 크리스토가 괜히 대작은 아닐것이다. 무고한 누명을 쓰고 그 원죄에 대한 피 끓는 복수심과 더불어 인간적인 고뇌를 지니고 있던 에드몽 당테스, 몽테 크리스토 백작. 나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