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584건

  1. 2009.01.09 당신이 숨기려드는 그 이름 바로, 몬스터 (Monster, 2004)

요한... 멋진 이름이었는데...

 

 

진정한 괴물은 누구였을까.
이름없는 괴물. 그는 언제부터 이름이 없었을까.
사실 그는 이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이름 없는 자.

그 괴물은 자기 자신의 자살을 꿈꾸고 있다.
내가 내 이름을 찾기전에 나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을 다 없애야한다.
날 이렇게 만든 자를 고독하게 만들어 죽음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름없는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허나, 이름이 있었던 자는 살아 남는다.

요한 ... 멋진 이름이었는데......

 

 

뇌에 총상을 입고 실려온 소년의 모습을 한 살인귀를 살려낸, 천재 뇌과의사 텐마.
살아난 후 살아난것에 대한 답례인양 인간들의 이름을 지워나가는 살인귀 요한.
자신의 손으로 살려낸 악마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 요한을 쫓는, 모든걸 잃어버린 텐마.
세간의 시선은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그랬으니 그러할것이다. 라고 자부하며 텐마를 살인마로 몰아 쫓는 경부 룽게.

있는 존재도 아니고 없는 존재도 아닌 이름없는 괴물의 존재를 인정 한 순간, 경루 룽게는 Dr. 텐마의 이름을 찾아준다.
이름없는 자는 이름을 지워나가며 자신의 이름을 찾아나간다. 이름을 찾는 순간, 그 이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어디에도...

 

 

 

우라사와 나오키의 역작. 빛나는 소학관상 수상의 작품 몬스터. 원작은 18권 완결이지만 애니메이션은 장장 6쿨 분량인 총 74화로 제작되었다.
극초반의 몰아치는 전개에 감탄을 거푸하며 그 자리에서 24화까지 감상을 했고, 이때까지만해도 아니메 감상을 마친 후 원작을 꼭 보리라 결심했건만, 완결인 74를 끝낸 소감은, 드디어 였다.

미스테리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긴 하나 본격 미스테리 표방이 아닌 휴머니즘 표방 미스테리 작이기 때문에, 전반부를 지나고 난후의 대부분의 추적과정이 휴머니틱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화가 거듭되어가면서 추가되는 군상들과의 교우들이 결국 절정으로의 부연 전개이긴 하지만, 지겹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또한 작가가 즈려놓은 메시지를 주워가면서 보는 미스테리 작의 특성상, 74화 완결작이 중반을 넘기기도 전인 30화를 지나면서의 진행과정과 전개 뉘앙스는 결말을 짐작케 한다.(이는 미스테리 작의 치명적 결함일지니)  사건 전말의 윤곽이 뚜렸하게 잡힌다거나, 범인에게 궁극의 원죄 추궁을 가한다거나 하는것들이 불가능한 작품임을...

18권 완결인만큼  원작 전개를 충실하게 따랐다 하더라도 4쿨 분량이면 충분했을듯한데 6쿨 분량이라 함은 지나치게 끌었다.
아직 몬스터를 보지 못한이들이나, 보려했는데 원작일지 아니메일지 생각중인 이들은 주저없이 원작을 택하라 권하겠다.
원작을 먼저 감상후, 남은 여운을 떨쳐내기 힘들때 본격적으로 모에 모드에 들어가는게 바람직할 작품이다.

 

 

511 킨더하임.
때는 구동독시절의 이름. 끔찍한 이름. 보육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자행되던 실험. 511 킨더하임에서 행해졌던 인간실험.
벽과 창이 보인다. 창의 위엔 환풍기가 돌아간다. 보면서 슬며시 마음의 ESC키를 눌러보자. 나치의 표식이 스쳐지나간다.
작가의 모티프일것이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토록 악마적 자행을 지휘하고 합주했다고 하기엔 이 511킨더하임에서의 부분을 너무 추상적으로 뭉뚱그려 놓는 바람에 개연을 방해하지 않았나 싶다. 인간에게서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 실험, 단지 그림책 낭독회와 함께 그들의 기억을 흐트려놓는 실험이었다는것 외엔 그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한 묘사나 구체적인 설명이 있진 않다. 후반부로 갈수록 선명해지긴 하지만 그것들로 유추해내기엔, 그들이 지워나간 또 그들로 인해 지워진 이들의 이름이 너무 아프지 않겠나.

대표적인 인물로, 글리머라는 인물을 짚어 설명하겠다.
모체내 태아시절부터 실험체였던 쌍둥이 요한과 안나와는 다른 루트의(어떤루트였는지를 모를) 511킨더하임 출신 인물.
킨더하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인물중의 일인.

이 인물은 킨더하임을 나온 후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여 슬하에 아이 둘을 두었었지만, 장남과 차남 모두 자살을 하였다는 설정의 인물. 명확한 이유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이들의 자살이유가 감정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건 여기서부터이다. 이 글리머란 인물은 자신의 두 아이가 죽었을때,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는 얘기와 함께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조차 몰랐다는 얘기를 한다. 대체 이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건지...
자신도 생명체로써 세상에 낳아졌고 낳아짐에 대한 이어짐인, 생명체의 생산과 출산에 대한 책임에 전제되는 행위에 대한 감정은 존재했지만 그 이후의 감정의 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거라는건가? 남성이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 라는것이 감정을 배제하고 가능한 일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분명이 감정이 존재했으니 행해진 행동들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감정을 갖고 행했지만, 아이들이 죽었을때 어떤 감정을 가져야할 줄 몰랐다니, 앞뒤 연결이 되지 않는 설정이다. 이 설정이 모순되지 않으려면 여자를 만났을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감정일때 결혼이란걸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 아이를 갖고싶은 감정이 생기는건지 몰랐다는 전제가 되어있어야 할것이다.

해서 최종화에서 다뤄진 원론적 괴물론은 그닥 가치를 매어두지 않겠다.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건지... 라는 쌍둥이 어머니의 독백을 그 어머니 그에게 돌리는것은 의미가 없어보인다. 실험체로써 모체에 존재했었으며 낳아서도 길러지는 과정도 그러했을, 그러니 그 어머니조차 진정한 자신의 아이가 아닌 실험 매개체 취급을 언제 어디에서부턴가 어느 마음 한구석 에서부턴가 하게 되었을. 그러니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건가... 실험은 누구에게 행해졌던 실험이었을까..... 누가 누구에게 실험을 행했단 말인가...
결국 이 작품은 내용을 관통하는 통찰적인 해석보다는 잎 --> 가지 --> 밑둥 --> 뿌리찾기식의 원론적인 해석이 합당할듯 싶다.

극찬을 받은 작품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필력은 있지만 치밀성은 떨어지는 필력의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허나, 생각의 공간을 두고 정리할 시간을 마음껏 준 작품이라 길게 남겨 둔다.

511 킨더하임에서 아이들에게 자행되었던 분명은, 그 실험들은 그들 자신을 점점 잊게 한다는것. 자신의 이름을 점점 잊게되고 결국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것. 잊혀지고 잊혀져서 결국 잃게 되는 이름의 그들이었다. 이름이 없어진다는것, 결국 존재가치에 대한 부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 얘기한다. 자신이 없어져가지 전에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어느날, 힘껏 흔들어 주체할 수 없게되버린 탄산수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지우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10살 남짓의 쌍둥이 남매, 요한과 안나.
서로를 기억해달라고 하던 그들이 스스로 지워버린 이름들, 과연 기억이 날까?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요한은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지워나간다. 나는, 기억해선 안되는 존재.
그래, 기억, 기억인건가? 인간은 기억을 위해 존재할까, 망각을 위해 존재할까.

진정, 표면으로 투영되어 비춰지는 상처럼 절대악을 지닌 요한이 마음이라는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악을 발현시킨것일까?
악은 늘 상주해있다. 어쩌면 악한 성질을 감출 얇은 블라인드 같은 존재인지도 모를 인간다움의 표상 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악과 선은 극한으로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악과 대립되는것은 ~~답다, 바로 인간다움일것이다. 답다는 표현의 전제가 정도껏의 선(善)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흑과 백을 따지는 논리앞에서 힘을 잃어버리기도 하는것이 바로 이 ~~답다는 것일것이다.

악이 ~~다운 선을 걷어내고 발현되었다면, 선은 과연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그걸 적출해낸 마음이 악인것일까? 구현해낸 마음이 악인것일까?
또 그렇다면 악을 상주하고 있는 인간들의 인간다움은 무엇일까. 휴머니즘은 대체 어떤 즘일까.

늘 상주해있는 악을, 그들 추구하는 목적이라는 얇은 막 속에 숨기고는, 잇고 또 이어가는 인간.
그들 모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름을 받고 살면서 이름을 지워나가는, 이름이 있다가도 없는,
그렇다면 이들, 이름이 있고 또 없는 인간들에게 진정, 악은 있는것일까? 없는것일까?

본인의 악하고 추한 모습을 본인이 객체가 되어 직접 바라보는건 아주 괴로운 일일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악함을 애써 부정하며 오히려 자위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그 모습을 감추려든다.
마치 자신은 악함이란 이름조차 모른다는듯이. 그것이 요한이라는 이름의 괴물일것이다.

진정한 악은, 진정한 이름없는 괴물은,
자신의 악을 제대로 마주보지 않는 자기 자신인것이다.
제대로 마주보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없어지고 또 사라질 수 밖에.

당신의 이름, 요 한...멋진 이름이었는데......





 

 

 

Posted by ellamia

블로그 이미지
우울한 환락.
ellamia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